단 한 줄도 읽어본 적은 없지만 공자(孔子)의 논어(論語)에는 생이지지(生而知之), 학이지지(學而知之), 곤이지지(困而知之)라는 말이 등장한다고 한다.
생이지지(生而知之)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알고 나온 자, 학이지지(學而知之)는 배워서 깨치는 자, 마지막으로 곤이지지(困而知之)는 배움에 있어 곤란함을 겪지만 결국 깨우치는 자를 말한다.
또한 불교(佛敎)에는 근기(根機)에 따라 깨우침이 빠른 정도를 상근기(上根機), 중근기(中根機), 하근기(下根機)로 분류한다고 한다.
물론, 공자님은 잘 모르겠으나, 부처님이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이런, 급 나누기식의 불쾌한 말씀을 입에 담았다고 믿지는 않지만, 아무튼 필자도 이렇게 생각했던 시절이 있다.
지금에 와서는 이 모든 말들은 사실 낭설이며, 수행(修行)에 있어서는 곤이지지(困而知之)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노력 없이 어느 날 저절로 신(神)이 내려 무당(巫堂)이 되는 경우는 무슨 대단한 존재라도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논리가 성립된다.
하지만 우리들은 무당(巫堂)을 대할 때, 존경심이 생기거나 성스러운 느낌을 느끼지 않는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섬뜩한 느낌을 받기도 하고, 오만하거나 천박한 느낌을 느끼게 된다.
물론, 무당 중에도 점잖은 말만 쓰고, 너그러운 마음씨를 지닌 경우도 존재하기는 한다. 그러나 삶을 주체적으로 살 수 없으며 항상, 무언가에게 간섭을 받는 등, 한계가 존재하기에 인간으로서는 불행한 일로 해석되곤 한다.
말하자면 인격에 있어 부처님이나 예수님처럼 인격이 흘러넘쳐 평안함을 주는 사람이 성자(聖子)이며, 기이한 신(神)이 내려 불편한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 무당(巫堂)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모두 같은 사람이므로 항상 자비심을 가지고 상대를 대해야 한다.
아무튼 곤이지지(困而知之) 즉, 하근기(下根機)의 수련방식은 상근기(上根機), 중근기(中根機)처럼 한마디만 듣고 척하고 깨닫는 방식이 아니라, 노력을 요구하는 수행방식이다.
이는 한 가지 목표에 집중해 철저히 닦아가는 방식으로, 복잡한 지식이나 다양한 수행법을 모두 익히기보다는 하나의 길에 전념하는 것이다.
오히려 상근기(上根機)와 중근기(中根機)의 사람들은 지나친 영민함 때문에 자만심에 빠져 실패하기도 쉽다. 어릴 때 천재라 불리던 사람이 어느 순간 범재로 전락하는 경우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다. 자만심에 빠져, 더 이상 수호·지도령(守護·指導靈)의 지도를 받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본질을 꿰뚫고, 알고 있는 바를 철저히 실천하며 닦아나가는 자세이다. 단전호흡(丹田呼吸)의 수행에서 핵심은 오직 '단(丹)'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이 또한 정법을 바탕으로 해야 하며, 나아 갈 때는 나아가고 물러 설 때는 물러 설 줄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