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살 전략에 대한 고찰 이성계의 무리수

모친은 전주이씨고, 부친은 개성 사람이다.
모친은 한 번도 조랭이떡국을 만들어 주신 적이 없다.
그러나 부친은 이따금 설날이면 말했다.
“북에서는 설날에 조랭이떡국을 먹지. 예리한 대칼로 이성계 목을 써는 느낌으로 만드는 거야.”
그 말은 푸념처럼 들렸지만, 나는 거기서 무언가 깊은 감정을 느꼈다.
칼로 떡을 써는 그 상상은 단순한 음식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말로는 표현되지 못한 시대의 분노와, 이름 없이 전해지던 저항의 기억이 거기 있었다.
나는 그 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
역사는 기록되지 않은 곳에도 존재하고,
때로는 식탁 아래, 조리대 위, 누군가의 말끝에서 조용히 이어진다.
그날 부친의 말 한마디가 조선의 정당성을 다시 묻기 시작한 나의 첫 질문이 되었다.

1. 서론

한국사의 전환점 중 하나인 조선 건국은 흔히 ‘혁명’ 혹은 ‘개국’으로 포장되어 왔다. 그러나 그 실체는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기존 문명과 사상 체계의 단절 및 조작, 그리고 그 위에 새로운 통치 정당성을 세우기 위한 철저한 기억 말살의 과정이었다. 본고는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권력 장악 과정과 그 이후의 정책들이, 고려를 단순히 대체하는 수준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부정하고 파괴하는 방식으로 정당성을 구축했다는 점을 중심으로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특히 조선이 채택한 성리학 중심주의, 그리고 불교를 국가 차원에서 억압한 '배불숭유(排佛崇儒)' 정책은 단순한 종교 교체가 아니라, 민족정신과 문화 전통의 단절 시도였으며, 그 결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사대주의적 세계관과 민족 자존의 붕괴를 낳았다. 이성계와 조선 초기 성리학자들의 사상적 교만과 정치적 모순은, 결국 한 사회가 어떻게 스스로의 뿌리를 자르고 외세에 종속되는 길을 택했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2. 고려의 정신성과 이성계의 권력 장악

고려는 불교를 중심으로 한 종합적 문화 문명이었다. 불교는 단지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행정, 교육, 의료, 예술, 천문학 등 전 분야에 걸쳐 깊숙이 스며든 사회 통합적 사상이었다. 이성계는 고려의 군사 엘리트로서, 그 체계 안에서 권력과 명성을 획득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1388년 위화도 회군을 통해 왕명에 반하는 군사 반란을 일으켰고, 점진적으로 고려 왕권을 붕괴시키며 1392년 조선을 건국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명백한 무력 쿠데타이며, 고려 입장에서 보자면 왕을 배신한 역적 행위로 규정된다. 실제로 그는 정통을 중시하는 고려 충신 정몽주를 제거함으로써, 자신이 이룬 권력의 도의적 결함을 은폐하고자 했다. 이성계 정권은 자신들의 행위가 비정통적이라는 내면의 자각을 갖고 있었으며, 그 죄의식이 이후의 ‘기억 말살 정치’로 연결되었다.

3. 성리학의 절대화와 사상의 정치화

조선이 국시로 채택한 성리학은, 중국 송나라 시기의 주자(朱熹)가 정립한 철학 체계로, 우주론과 인간 본성에 대한 관념적 사유를 담고 있다.이는 철학적 정교함을 갖추고 있으나, 본래부터 정치 통치 이념이나 사회 시스템 전체를 대체할 만한 현실 이론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은 이를 유일한 국가 이념으로 전면 수용하며, 기존의 문화 전통은 물론 다른 사상들을 모두 '사문난적'으로 규정해 억압하였다. 성리학은 곧 국가 이념, 도덕 기준, 인간의 이상형, 교육 체계, 심지어 법률의 방향성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다양성의 억압, 창의성의 단절, 위선적 명분주의의 제도화로 이어졌으며, 이는 조선 후기 사회의 경직성과 퇴행성을 초래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4. 배불숭유 정책과 고려 문명의 조직적 말살

이성계 정권과 그 후계자들은 자신들의 정권이 고려의 연장선이 아니라 완전한 단절임을 선언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제거된 것은 고려의 상징이자 문화적 정체성의 근간이던 불교였다.

'배불숭유'는 단순한 종교 교체가 아니라, 사상과 문화의 대량 파괴 정책이었다. 수천 개의 사찰이 해체되고, 승려는 천민으로 격하되었으며, 불교 미술과 건축은 파괴되거나 몰수되었다. 이와 같은 폭력적 조치의 이면에는, 이성계가 스스로를 '고려의 배신자'임을 인식하고 있었고, 그 정당화를 위해 고려의 정신과 기억을 '지워야만 했다'는 정치적 강박이 자리 잡고 있었다.

5. 반박과 그에 대한 재비판

5.1 “불교도 외래 사상 아니냐”는 주장에 대해

불교가 외래 사상이라는 주장은 사실이지만, 이는 불교의 역사적 위치와 문화적 통합 과정을 무시한 단편적 해석이다.

불교는 인도에서 기원했지만, 한반도에서는 오랜 세월을 거쳐 토착화되었고, 고려 시대에는 이미 민중의 삶과 문화에 깊숙이 뿌리내린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반면 성리학은 송나라 지식인 집단에 의해 체계화된 이론으로, 조선은 이를 한 세기도 채 지나지 않아 급속히 수입·절대화했다.

따라서 두 사상의 ‘외래성’을 비교하며 정당화를 꾀하는 것은, 실질적인 문화 통합과 현실 적용성의 차이를 왜곡하는 오류다.

5.2 성리학자들의 부처 폄하와 사상적 교만

조선 성리학자들은 불교를 이념적으로 억압했을 뿐 아니라, 표현적으로도 철저히 멸시했다.

부처는 ‘석씨’, ‘석가’ 등 낮춰 부르는 방식으로 언급되었고, 성인인 부처를 공자에 비해 “현실을 도외시한 미혹된 자”로 간주되었다.

이는 단지 사상적 이견이 아니라, 지배 사상으로 타 종교를 말살하려는 정신적 폭력의 표현이었다.

그들은 불교 승려를 “세금 도둑”, “백성의 노동력을 빼앗는 존재”로 몰았고, 이러한 담론은 민중의 미움을 조직적으로 유도하여 불교를 매장시키는 정당화 장치로 작용했다.

6. 사대주의의 확립과 민족 정신의 분열

조선은 성리학 수용과 동시에 중화 문명에 대한 절대적 복속 의식, 즉 사대주의를 체제에 내재화시켰다.

명나라에 대한 병적인 충성은 청나라 시기에도 유지되었으며, 이는 자주적 외교는 물론 자신의 민족 정체성을 부정하게 만드는 문화적 자해로 이어졌다.

이 사대주의는 해방 이후까지도 형태만 바꾸어 친일 잔재의 미화, 외세 눈치 외교, 민족 분열적 사상 대립등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한국 사회의 정신적 기초를 흔드는 구조적 요인으로 기능해 왔다.

7. 역사 결과에 내재된 모순: 훈민정음 창제의 이면

조선 왕조는 한편으로 고려를 철저히 배제하고, 성리학적 질서에 기초한 경직된 통치 체계를 강화했으며, 불교와 같은 기존 정신 자산을 제거하는 문명적 단절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조선은 그 같은 억압적 질서 안에서 동아시아 문명사에 길이 남을 혁신적 결과인 '훈민정음'을 창제한다. 이것은 조선을 단순히 성리학적 권위주의 체계로만 규정할 수 없게 만드는 요소이지만, 동시에 조선의 모순적 구조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예시이기도 하다.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대왕이 1443년에 시작하여 1446년 반포한 위대한 업적으로, 문자 사용에 있어 한자 중심의 지배 질서로부터 민중을 해방시키고자 한 지극히 실용적이면서도 자주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이것이 탄생한 배경을 고찰할 때, 우리는 단지 훈민정음이라는 결과만을 찬양할 수는 없다.

첫째, 세종은 성리학을 국시로 채택한 왕조의 후계자였고,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 역시 성리학 중심의 정치적 통제 체제하에 있었다. 당대 지배 엘리트였던 성리학자들은 훈민정음을 ‘언문(諺文)’이라 낮춰 부르며 천민적 문자, 여자와 아이나 쓰는 글로 비하했고, 실제로 수백 년 동안 지배층은 이를 공적 기록에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둘째, 훈민정음은 자주적 문화 자산이었지만, 그것을 창제한 국가 체제 자체는 사대주의를 통해 정통성을 외부에 의탁하고 있었으며, 내부적으로는 민중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억제하는 경직된 성리학 질서를 강요하고 있었다. 즉, 훈민정음은 조선이라는 체제가 '원래 가지고 있던 성격'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종 개인의 혁신적 통찰과, 통치자로서의 내면적 고민에서 비롯된 예외적 행위였다.

셋째, 이 혁신조차도 조선 체제의 모순을 바꾸지는 못했다. 훈민정음은 오랜 기간 주류 문서 체계에서 배제되었고,그 기능이 활성화된 것은 민중 운동과 근대 개화기 이후였다. 이는 조선 사회가 얼마나 보수적이고 자폐적인 방향으로 굳어져 있었는지를 증명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역사는 결과만으로 평가될 수 없다”는 사실이 다시금 강조된다. 한글은 분명 민족의 자부심이자 세계적 자산이지만, 그 태동은 조선이 스스로 쌓아 올린 성리학 중심 질서와 충돌하며 발생한 것이다.

그 결과가 위대하다 해서 그 과정과 그 속에 내재된 모순을 면죄할 수는 없다.

8. 결론

조선은 권력의 정당성을 세우기 위해 고려 문명과 정신을 말살하고, 성리학이라는 외래 사상을 절대화하며 스스로를 사대주의적 질서에 종속시켰다.

그 결과, 조선은 겉으로는 문명 국가의 형식을 띠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정신적 주체성을 상실한 채 권위주의와 위선의 체계로 경직되었다.

훈민정음이라는 위대한 결과조차 그 안에서 이질적인 예외로 태어났고, 그 자체가 조선 체제가 얼마나 모순적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반증이 되었다.

우리는 이 모순을 직시함으로써, 단지 결과가 아름다웠다는 이유로 그 체제 전체를 정당화하려는 역사적 자기기만을 넘어서야 한다.

역사란 단순한 사건의 축적이 아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선택, 회피, 조작, 그리고 숨긴 진실이 존재한다. 이제라도 우리는 묻고 성찰해야 한다.

“누가 무엇을 위해 무엇을 지웠는가?”

그리고 “그 지워진 것 속에 진짜 우리의 정신은 남아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