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단(神丹)과 최면술에 대하여

신단(神丹) 수련이 혹시 최면술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의문을 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최면술의 역사는 의외로 오래되었다고 한다. 바라문(브라흐만)에서 요가(yoga)가 나오고, 요가의 육체 수행자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의식 조정 기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사회에 나와 활동하면서, 타인보다 우위에 서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연구와 추구의 결과가 최면술의 시초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부처님께서는 당시 이미 최면술의 위험성을 경고하셨다고 한다.

최면술은 의식을 잠재우고 한곳에 집중시켜, 그 외의 것에 대해선 상실된 상태를 만드는 기술이다. 이렇게 의식을 억누른 뒤 암시를 주면, 팔을 내리려 하면 오히려 올라가고, 올리려 하면 반대로 내려가는 식의 반응이 나타난다.

오늘날 의학에서도 스트레스나 신경증 치료를 위해 연구되고 있으나, 그 효과에는 의문이 있다. 마음의 때가 그대로인 상태에서 최면만 걸어서는 근본적인 치료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잠시 좋아진 듯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최면술은 ‘시술자’의 암시를 ‘피시술자’가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즉, 자기 의식을 타인의 조종 아래 두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이는 정신적 고통을 치유하기보다 오히려 왜곡할 위험을 내포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전문가니까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런 오컬트 종류에 관심 있는 사람일수록, 과학적 합리성보다는 타인이 자신의 의식을 의도적으로 조종한다는 사실에 대해 의학적·도덕적 문제를 묻지 않는 경우가 많다.

최면으로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한 채 수술을 하는 사례도 있지만, 이는 아무래도 위험해 보인다. 왜냐하면 최면에 걸린다는 것은 곧 최면 감수성이 높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최면 감수성이 낮아 최면이 아예 잘 걸리지 않는다면 차라리 문제가 없지만, 감수성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애매한 경우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럴 때는 최면 상태가 불안정해져 도중에 풀릴 가능성이 있으며,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특정 마취제에 부작용이 있는 경우 대안으로 고려할 수는 있으나, 전적으로 의지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크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더 큰 문제는, 최면 감수성을 마치 타고난 장점처럼 포장하는 풍조이다. 심지어 자신도 감수성을 더 높일 수 없는지 고민하는 이들까지 있다.

그러나 최면 감수성이란, 다른 시각에서 보면 타인의 의사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상태에 불과하다. 이렇게 자기 의식의 주도권을 쉽게 내어주는 것은 무책임해 보이며, 불순한 의도를 가진 이들의 악용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반면, 신단(神丹)은 생명에너지를 축적하는 수련이다. 자신이 주도하여 생명에너지를 인식하고 끌어들여 축적하는 방법이므로, 최면술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더구나 최면술은 암시자와 피암시자가 필요하지만, 신단은 오직 자신의 주체적 수련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신단이 최면술과 같은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아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