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단(神丹) 용어는 사라지고 집중력만 남는다

코페르티노의 성 요셉(이탈리아어: San Giuseppe da Copertino, 1603년 6월 17일 – 1663년 9월 18일 - 사후 1767년에 시성 되었다.)이라는 분이 있었다. 이 분은 자주 인체부양 현상을 보여 유명한 분이다. 하지만 예고 없이 아무 때나 공중을 향해 몸체가 떠오르다 보니 곤란해했었다고 전해진다.

사람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점도 부담이 되고, 본인도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본인 스스로 인체부양이 되지 않도록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하지만 기도 자체가 생명에너지를 끌어드리는 작용을 한다.

생명에너지를 충분히 축적시킨 상태에서 생명에너지의 리듬이 최고조가 되고, 이때 우주의 생명에너지의 리듬도 최고조일 때 인체부양 현상이 일어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주위의 신자들이 박해를 가하자 그런 능력이 사라졌다고 한다. 질투와 시기심은 좋은 생명에너지가 형성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인적이 없는 깊은 산중이나 계곡에서 수련을 하면, 질 좋은 생명에너지가 쉽게 형성되지만, 도심지나 사람이 많은 도시에서는 어려운 이유는 이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다시 원기를 회복하여, 성모마리아 상을 날아올라 끌어안는 등의 기적을 보였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성 요셉의 경우는 자기도 인식하지 못한 체 신단행공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생명에너지가 어떻게 해서 축적이 되는지, 이것을 축적하면 어째서 우주를 향해 몸체가 떠오르게 되는지, 그 원리를 알지 못했다.

그것은 진리를 향한 간절한 염원, 그것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정법(正法)’에 의지해, 이런 성 요셉의 순수하고 간절한 상태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신단행공(神丹行功)은 반드시 신단용어만 외쳐야 하는 것은 아니다. 홍태수가 신단의 차기작인 ‘신공(神功)’에서 그러한 사실을 다뤘다. 노래를 부르기만 해도 생명에너지가 작용 하는 ‘가공(歌功)’, 소리를 들으며 생명에너지를 축적하는 ‘청공(聽功)’, 책을 읽으면서 생명에너지를 축적하는 ‘독공(讀功)’, 말하면서 생명에너지를 축적하는 ‘언공(言攻)’ 등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골자는 바로 ‘집중력’과 ‘정성’에 있다. 매사에 이런 마음가짐으로 대한다면, 그것이 ‘신공(神功)’이기도 하므로,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모든 생각과 행위에 정성스런 마음가짐으로 대하면, 그것이 바로 신단이기도 하고 이것으로 인해 생명에너지와 연결된다.

또한, 이상스런 일이지만,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이런 현상이 아주 희박하게 나타나지만, 신단이나 단전호흡을 수련하신 분들이라면, 아주 자연스럽게 생명에너지와 연결된다.

이런 원리가 우주에 몸을 숨기며 조용하게 움직이고 있기에 부처님이 말씀하신 ‘팔정도(八正道)’를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수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집중’ 상태는 신(神)의 의식(意識)과 일체화가 그 배경에 도사리고 있다. 우리가 집중한다는 것은 결국, 신(神)의 의식(意識)과 일체화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그것은 본능이라는 상태로 신(神)이 우리에게 부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집중에는 그 끝이 있으며, 더이상 집중할 수도, 더이상 집중할 필요가 없는 경지가, ‘신인일치(神人一致)’의 상태이다.

아무튼, 오래 신단을 수련하다 보면, 신단용어만 외치는 게 지루하기도 하고, 부담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본능적으로 스스로 더 깊은 단계로 몰입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사실, 신단용어를 외치는 이유는 처음에 생명에너지를 체험하기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 수준에 머물기만 해서는 더욱 깊이 있는 경지에 다가서는 것이 곤란해질 수 있다.

위에 설명했듯, 정성과 집중이 바로 신단의 근본 원리이기 때문에, 신단행공은 자연스럽게 팔정도(반성명상)과 연결이 된다.

이렇듯 신단의 다음 단계로 팔정도의 실천이라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 주어져 있으므로, 더욱 높은 곳을 향해 하루하루 열심히 정진해 나가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