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문자의 모호함 (도올 김용옥 제15강 무아란 무엇인가)

도올 김용옥 제15강 무아란 무엇인가 유튜브 썸네일

도올 김용옥 선생께서 「무아란 무엇인가」의 강의 중 언어의 모호함을 설명하고 있다. (19:05)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법은 인간의 지(知)나 의(意)에 의해 변질되고, 언어와 글자의 모호함으로 인해 퇴색되고, 그 본질을 전하지 못하고 화석화되었다.

생전 김치를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아무리 김치 맛을 설명해 보아도, 김치 맛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김치 맛을 잘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다만, 부처와 예수가 다른 가르침을 주었다는 말씀은 찬성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이는 도올 선생이 스스로 지적했듯이 두 성자의 말씀은 말과 문자의 모호함과 함께, 사람들이 슬며시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그 진위를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도올 선생이 말씀하는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달마라는 사람의 생각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간결하다. 팔정도(八正道)의 실천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마는 팔정도(八正道)를 포기하고, 선(禪)을 주장하고 나왔다.

달마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참선에 몰두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참선을 한다고 해서 인간의 위대한 마음을 깨닫지 못했다면 결국 헛일이 된다.

달마 자신이 깨달았던 이유는 깨달음에 대한 열망, 그것이 마음을 열게 했을 뿐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처님은 ‘싯달타’라는 어떤 깨달음을 얻은 젊은이가 아니다. 처음부터 부처로 태어났다고 봐야지, 시시하게 깨달음을 얻는다고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생전 수도 과정만 생각해서, 고생 끝에 깨달음을 얻은 젊은이 정도로 인식할 수 있는데, 이것은 오해인 것이다.

부처님은 부처가 정법(正法)을 깨달아서 그런 위대한 삶을 살았던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소위 세상에 넘치는 ‘각자(覺者)’들이 말하는 깨달음은, 정법(正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여러 가지 정신적인 현상을 잠시 보고 난 후, 착각에 빠진 경우이다.

불법(佛法)은 학문(學文)도 철학(哲學)도 아니다. 불법(佛法)이란 실천하는 가운데 생명이 깃드는 삶의 규범(規範)이기 때문이다.